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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관리자 | 2014.04.16 10:27 | 조회 2292

 

◈불국사◈

'불국사' 하면 아무말이라도 한마디 덧붙이지 못하고 묵묵히 있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범영루의 처마에 걸린 아침해와 긴 석축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한 점 갖지 못한 사람은 또 몇이나 될까.

수학여행에다 신혼여행에 효도관광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우리 나라사람이라면 한번쯤 다녀간 관광지가 불국사이고 석굴암이다.

그러나 실상은 불국사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는 생각이 바로 불국사를 슬프게 하는 오해 일는지도 모른다. 흔히 불국사를 조화적 이상미와 세련미를 보여주는 신라문화의 정수이며 완결편 이라고들 한다. 무엇이 그런 극찬을 받게 하는 것인지, 무지의 눈과 번잡한 마음을 싹 씻어 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불국사를 다시 보자.

화려하고 장엄한 부처님의 세계를 땅위에 옮겨 세우려면 국민들의 합심과 그것을 뒤받침 해줄 만한 경제력, 곧 국력이 있어야한다. 삼국이 통일되어 나라가 안정되고 모든 문화가 골고루 발달하던 시기에 불국사는 만들어졌다. 『삼국유사』에는 경덕왕10년(751), 김대성이 불국사를 창건하였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불국사는 법흥왕 15년(528)에 지어졌고, 문무왕 10년(670)에 지은 무설전에서 의상의 제자인 표훈이 머물렀다고 하는 등 불국사 창건에 관해『삼국유사』와 다른 기록을 보이지만, 이는 믿을만한 연대가 못된다. 다만 총2천여 칸에 이르는60여 동의 크고 작은 전물들로 이루어졌다는 기록으로 보아 불국사의 규모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후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 중수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크게 불타 석축만 남게 되었다. 창건 후 650여년간 뭇 사람들에게 참된 부처님, 참된 아름다움의 세계로 기억되던 불국사는 그 뒤로 여러 차례 다시 세워지곤 하였다. 그러나 이미 전쟁으로 국력이 기운 뒤였고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도 퇴락의 길을 걷고 있던 까닭에 신라의 정신을 되살릴 길이 없었을 터이다.

그 뒤 자하문, 범종각, 대웅전, 극락전 등만 간신히 남아 있다가 1969년 발굴 조사 뒤, 없어졌던 무설전, 관음전, 비로전, 경루, 회랑 등이 1973년의 대대적인 보수공사로 복원 되었다.

불국사는 높은 축대 위에 평지를 조성하고 여기에 전각들을 세운 대표적 가람이다. 현재의 경내는 크게 세 영역으로 나뉘는데, 대웅전과 극락전, 비로전이 각각중심 건물이 된다 극락전 뒤쪽에 복원되지 않았으나 법화전지로 알려진 건물터가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창건 당시의 불국사와 현재의 불국사 규모에는 차이가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낱낱의 영역은 영역에 이르기 위한 계단, 영역 입구인 문, 영역의 중심 건물 영역을 둘러싼 회랑 등의 네 가지 기본 요소로 이루어진다. 불교적 해석을 빌면 각 영역이 하나의 이상적인 피안세계인 불국을 형상화한 것으로, 대웅전 영역은 석가여래의 피안세계를, 극락전 영역은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를, 비로전 영역은 비로자나불의 연화장 세계를 나타낸 것이다.

-다보탑


사면으로 계단을 놓은 사각의 육중한 기단 위에 날개를 편 듯 힘찬 추녀가 가로 뻗친 사각 기와집 형식이며 , 그 위에 연꽃잎 모양으로 창문을 낸 팔각정이 세워진 3층 양식의 화려한 탑이다. 팔각지붕에는 귀마다 풍경이 달려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구멍이 뚫려 있다.

탑의 높이는 10.4m이며 국보 제20호로 지정돼 있다. 다보탑은 다른 탑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통일신라 최전성기의 화려한 탑으로 완전히 규범에서 벗어나 참신하고 기발한 착상으로 이루어 졌다.


또한 각 부분의 조각수법에 있어서도 마치 목조구조물을 보는 듯 아름답다. 다보탑은 그 화려함만큼 설명이 시끄러울 정도로 복잡한 구조로 짜여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짜증을 만들어내는 복잡함이 아니라 정교함과 조화를 느끼게 하는 세밀함이라는 데에 묘미가 있다. 1층은 억센 사각, 2층은 아담한 팔각, 3층은 부드러운 원. 이렇게 변화를 주면서 강함은 차츰 연약하게 되고 억센 힘은 점점 부드러워진다.

사각의 기와집 앞에 놓인 돌사자는 원래 네 마리였으나 지금은 한 마리만 남아있다. 하지만 연화대좌에 새긴 꽃 모양이며 화려한 목걸이로 미루어보아 이 사자는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고 장식적인 사치를 즐겼던 9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하는 짐작도 된다. 흙을 주무르듯 돌을 잘 구슬리고 다듬어낸 것이 다보탑의 솜씨라면, 석가탑의 솜씨는 커다란 통돌의 크기를 줄이면서 깔끔하게 상승하는 느낌을 만들어낸 것이다.

-석가탑

튼실한 2중의 기단 위에 탑신부의 몸돌과 지붕돌이 단순한 모양으로 크기가 줄어 들면서 차곡차곡 쌓아져 3층으로 솟아오른 석가탑은 감은사터 삼층석탑과 고선사터 삼층석탑에서 이어지는 통일신라삼층석탑의 전형을 이루고있다.
탑의 높이는 8.2m이며 국보 제21호로 지정돼 있다. 석가탑은 창건 이후 상륜부를 제외하고는 큰 손상 없이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왔다. 1966년 보수공사도중 석탑 안에서 사리 장엄구와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물이라 할 수 있는 무구 정광다라니경(국보 제126호)이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석가탑이 보여주는완벽한 균형미는치밀한 계산으로 만든 상승감과 안정감에서 비롯된다.


1층의 몸돌과 2,3층의 몸돌의 비율이 4:2:2를 보이는 것은 감은사 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래쪽에서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을 고려한 것이다.
또한 지붕돌의 끄트머리를 보면 위로 치켜올려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지붕돌의 낙수면 끝을 사선으로 내려친 것으로 끝이 위로 올라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단정한 기단부와 탑신부에 비해 상륜부가 다소 시끄럽고 무겁게 보이는 것은 석가탑보다 백년이나 뒤에 만들어진 남원 실상사 삼층석탑의 상륜부를 그대로 본떠 만들어 얹었기 때문이다.

또한 석가탑 아래에는 넓은 꽃잎으로 된 팔방금강좌가 둘러져 있어 전체적인 안정감을 더해준다. 석가탑은 '무영탑' 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탑을 만들었다는 석공 아사달과 아사녀의 전설이 있는 영지가 불국사 입구매표소에서 멀리 서쪽으로 내다보인다.

청운교, 백운교

범영루와 좌경루가 솟아있는 석축 중앙에 쭉 힘차게 내뻗은 계단이 있다. 위쪽의 16계단이 백운교이고 아래쪽의 18계단이 청운교이다. 이 돌계단을 올라서면 자하문을 거쳐 대웅전으로 들어가게 된다. 청운교 밑에는 무지개 처럼 둥근 들보 모양으로 만들어진 홍예문이 있다. 지나치게 고요하고 안정된 긴 석축에 둥근 곡선으로 변화를 일으켜 생동하는 기운을 불어넣고 있다.

원래 석축아래에는 연못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계단왼쪽에 토함산의 물을 끌어들여 연못으로 물이 떨어지게 한 수구가 남아있다.

이 수구(오른쪽 사진)에서 연못으로 물이 떨어지면 거기서 이는 물보라에 무지개가 떴다고 한다. 못 위에 놓인 청운, 백운교와 연화, 칠보교, 긴 회랑과 경루, 종루 등 높은 누각들이 거꾸로 물위에 비쳐 절경을 이루었을 터이다. 청운. 백운교계단을 올라서면 자하문이다. 자하문은 석가모니의 피안세계인 대웅전 영역으로 들어서는 관문이다.

부처님의 몸을 자금광신(紫金光身)이라고도 하는데 자하문이란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자주빛 금색이 안개처럼 서리고 있다는 뜻이다. 이 문을 통과하면 세속의 무지와 속박을 떠나서 부처님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국보 제23호로 지정돼 있다.
한편, 자하문에서 내려다보면 범영루와 좌경루를 받들고 있는 주춧돌이 보인다. 특히 범영루의 주춧돌은 특이하게 쌓여 있다. 주춧돌은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각기 8매의 판석으로 조립되었는데, 밑 부분을 넓게 하고 중간에는 가늘고 좁게 하였다가 다시 밑 부분과 같이 넓게 쌓았다. 이러한 건축 양식은 아무데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모방할 수 없는 신라특유의 슬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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